목회자료
교회학교
모임자료
기타자료
사진자료
존경받는 목회자 프린트   
글로리  Homepage Email [2006-12-18 19:34:19]  HIT : 4855  
첨부파일 : 81_1)존경받는_목회자.hwp
존경받는 목회자
증거하는 힘을 상실한 교회는 한낱 성경 읽는 야학당이요 음치들이 모여 부르는 3류 합창단의 집회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요일과 일요일만 성경의 구절을 암송하고 다른 날은 세리와 창녀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 들, 이웃의 눈물에 대하여는 외면하고 미국 선교사와 더불어 사랑과 종교를 논하는 저 능란한 위선자의 무리를 나는 너무나 많이 기억하고 있다. 증권거래소와 교회가 어떻게 다른가 권력자와 교회가 어떻게 다른가 근본적으로 신자의 모임과 불신자의 모임이 어떻게 다른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두터운 성경과 찬송가를 옆에 끼고 하늘만 쳐다보고 다니면서 의로운 체 하지 말자.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하나님이나 된 듯이 교만하지 말고 인간임을 자인 하자.
  이것은 오래 전 어떤 기독교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로서 한국교회를 향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질책을 담고있다.
  우선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이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국교회가 개혁되어 새로 와져야 한다는 공통적인 인식과 허물이 있음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교회,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우 리 교회를 향하여 자책하는 뜨거운 심정을 가지고 몇가지 제언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 개인적으로 교회 지도자인 목회자에 대하여, 다음으로는 교회 구성원인 성도들의 신앙에 대하여, 마지막으 로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차라리 삯군 목자라면
과연 대가를 받지않고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성직자라 불려지고, 그런 사람만이 참 목자인가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얼마의 금전 사례를 받았다고 해서 삯군 목자인가 예수께서는 금전의 보상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선한 목자이며, 삯군 목자는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던가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기준이 목자와 주인 사이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양과의 관계에서 설정되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삯은 주인과의 관계이지만 목자라는 직무는 양과의 관계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생명을 준다. 그러나 삯군 목자는 양의 고난을 외면하고 무책임하게 자기 자신의 안일 만을 추구한다(요10:12). 베드로는 부당한 이득을 추구하지 말고 양무리를 치라(벧전5:2)고 하였다.
  나는 과연 선한 목자인가 누구에게 말할 것도 없이 교회의 지체이며 지도자인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본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까지 아낌없이 주었기에 선한 목자라고 스스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양을 위하여 생명을 주 지 못했고 그들을 위해 희생은커녕 오히려 섬김을 받으며 살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셨는데 나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남에게 주기는 커녕 오히려 받는데 익숙하여 목회 연한이 거듭될수록 점점 빚만늘어가고 있다.
  어느 교회이든 한 해의 지출 항목에 제일 첫째 칸은 목회자에 대한 사례비가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명칭이든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지며 매월 규칙적으로 정해진 만큼의 보수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요즈음 목회자들이 이미 직업화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매월 정기적인 급여(?)와 일년에 몇차례씩 상여금(?)까지 받 고있는 나는 삯군 목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도대체 나는 얼마만큼의 삯을 받고있는 삯군 목자인가 최고의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보직과 관계없이 한 시간을 강의하는데 대략 2만원 정도의 강사료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헌신예배나 강습회 등에 초청받아 한 시간 설교하거나 강의하고는 그보다 적은 액수의 사례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목회활동의 연장인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주례를 마치면 개인적으로 제법 많은 사례비를 받는다.
  또한 교회에서도 도서비, 심방비, 교통비 등 모든 활동에 재정적 배려를 아낌없이 받는다. 집을 제공받고 유지비를 비롯한 모든 세금, 공과금까지 책임져준다. 이 세상에 끼니 때마다 정성껏 떠서 모여진 쌀로 양식을 삼고, 남아서 이웃 개척교회까지 나누어 주는 복된 직업이 어디에 또 있을까 흔치 않은 경우지만 다른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고 나면 거의 한달 생활비와 맞먹는 사례비를 받는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어떤 특정 직업을 허가난 도둑이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혜택을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무리하게 요구한다고 느낀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리라. 일한 것보다 더 많은 부당한 이득을 얻고 있는 나 자신을 거룩한 도둑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늘에서 받아야 할 것을 미리 당겨 쓰고도 더 탕진한 가불 목자인 셈이다.
  가끔 시골 마을의 교회에서 기둥처럼 일하던 좋은 일꾼들이 이사를 나와 면소재지에 있는 우리 교회에 등록한다.
  그럴 때면 시골 교회의 목회자들은 일부러 나에게 찾아와 그 분들을 잘 부탁한다며 몇번이나 말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이킨다. 그때마다 내가 마치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자본가의 사업을 침식하는 대기업의 문어발이나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여 배를 불리는 악덕 기업인이 된 듯한 죄책감에 가슴이 아파진다.
  경제적인 효율성과 이익을 신(神)처럼 숭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계열회사의 적자를 서로 메워주고 사회에서 얻은 이익을 환원하기 위하여 복지 사업에 관심을 갖는 기업이 있다는데.
  그렇게도 사랑과 정성으로 키운 일꾼들을 내보낸 시골 교회 목회자들에게 선교비란 명목으로 매월 보내는 몇 만원의 돈이 얼마나 위로가 될까 젊은이들이 모두 떠난 시골교회, 하나님 나라의 대합실 정도로 예배당을 드나드는 몇사람의 노인들을 바라보며 크리스챤의 사회적 책임과 행동하는 신앙을 설교하는 젊은 목회자들의 부르짖음은 차라리 아픔일 것이다.
  여름이면 비가 줄줄 새는 천장, 겨울이면 연기로 예배당을 채우는 톱밥 난로, 시집올때 가져온 가스렌지를 보자기로 덮어 놓은 채로 연탄불에 밥을 지어야하는 목회자 부인들의 거친 손은 안타깝기만 하다. 옛날 이 예배당을 지을 때만 해도 기둥같은 장정들이 많았지요. 하지만하고 말끝을 흐리는 노인의 눈에는 안개가 서리고, 군데군 데금이 가고 뒤틀려가는 예배당 건물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목회자에게는 신학교 시절 즐겨 쓰던 비전, 교회성장, 교회행정 등의 용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리라.
  대형 교회가 많아지고 교회가 기업화되어 간다는 비판을 흔히 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교회만이 교회다운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도 예외는 있는 것. 100년을 넘은 한국교회의 역사에 수백억짜리 교회당이나 수천, 수만의 사람이모이는 교회도 몇개쯤은 있을 수 있다.
  초대교회의 가정집회소에 비한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초대형 교회의 집산지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건물의 평수나 사람의 숫자, 재정의 풍부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만큼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평의 건물이 가치있게 쓰여지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빛을 드러내고 소금처럼 맛을 내며, 천문학적 수치의 재정이 아름답게 쓰여질 때 누가 교회를 비판하겠는가 수백억짜리 여객기를 구입하였다고 탑승 객이 불평하지 않는다. 값비싼 첨단 의료장비를 설치하였다고환자가 투덜대지 않는다.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하는 예산을 트집잡을 운전자는 없다.
  농어촌 교회에 뿌리를 박고 있는 도시교회가 시골교회의 미래를 향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가 전도하고 양육한 새신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거저 받아들인 도시교회가 도둑 교회가 되지 않으려면 명 분있고 자랑하기 좋은 경쟁적인 도시지역 개척교회 설립보다는 자신들의 젖줄인 시골교회 목회자의 생활, 예배당 개축, 보수, 교육시설 보충, 무교회 자연부락의 교회 설립에 투자하여 적어도 받은 만큼은 환원하는 삯군 교회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적게 받기 위해, 받은 만큼은 일하기 위해 더욱 부지런해져야 하겠다. 도둑 목자, 가불 성직자에서 적어도 삯군 목자는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희생의 십자가를 지자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고 십자가에 자신과 세상이 못박혔다고 고백한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 를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구원의 문에 들어감을 그 첫단계로 하고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며 십자가의 종교라고도 말한다. 교회 첨탑에는 예외없이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교회 강단과 목회자의 예복에도 붙어 있다. 이제는 개인의 장신구에서 개인의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흔히 볼 수 있다.
  교회를 상대로 상품을 제작하는 기업들은 특별한 기술도, 유행이 바뀔까 염려할 필요도 없이 십자가의 변함없는 인기를 믿고 물건을 만들어 낸다. 교회의 직원들은 십자가 그늘 밑에 아주 편안하게 생활을 보장받는다. 대도 시의 밤풍경에서는 앞을 다투듯밤하늘 높이 빛나는 무수한 십자가 네온등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면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10:28)고 한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가 실제로 인간들에게 보여준 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장인 골고다까지 땀과 피를 흘리며 지고 가신 십자가로서 결국 자신이 매달려 죽은 참혹한 형틀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역경이나 시련, 무거운 고통 등 인간의 모든 불행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크리스챤들은 고난과 아픔으로 이름하는 희생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보석으로 빛나는 십자가 목걸이로 단장한 여인들의 어깨에도 십자가가 있는가 그 무게를 지탱하다 못해 쓰러질 만한 수 고가 있는가 밤마다 도시의 어둠을 십자가 네온으로 밝히는 교회, 요란한 차임벨로 이웃의 새벽잠을 깨우는 교회 는정말 시대의 아픔을 역사 속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교회인가 십자가 장식을 즐기며 그것을 바라보는 구경 꾼, 십자가를 믿고 장사를 하는 사업가, 그 능력을 이용하여 권위를 세우는 자칭 주의 종들, 이제 모두 그 십자가 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가슴 위로 조용히 숙여지는 그 고통스런 머리, 그의 볼 위로 뚝뚝 핏방울이 떨어져 흐르게 하는 가시돋힌 면류관, 잔인하게 꿰뚫려 갈라진 그의 두 손, 체중을 지탱하다 못해 쪼개어지는 그 신성한 발, 엘리 엘리 라마 사박 다니의 부르짖음, 창으로 뚫린그 옆구리의 물과 피, 이 모든 것이 상징이나 조각품이 아닌 생생한 체험으로 다가 와야 한다.
  원래 안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yada)나 헬라어 기노스코(ginosko)는 알다, 깨닫다라는 뜻과 함께 동침한다(창4:1, 마1:25)는 뜻이 있다. 얼굴을 알고 대화와 교제로 아는 것이 지식 이라면 부부가 되어 서로를 아는 것은 체험이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나아가서 거기에 함께 달려있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고후4:10)을 느낀 바울,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기를 함께 못박았고 이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십자가를 평생 지고 살았기에 내 몸에 예 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고 말할 수 있었다.
  콘스탄틴 이후로 십자가는 금으로 장식되고 사람을 죽이는 전쟁의 창과 방패, 군기 등에 그려짐으로 우상화의 위험성을 안고 공개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십자가는 개화, 서구문물과 동일하게 여겨졌고, 십자가 표지를 앞세우고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었다. 또한 극심했던 가난과 전쟁의 와중에서 십자가가 있는 예배당은 구호와 원조의 처소이기도 했다. 전쟁터의 붉은 십자가는 적군도 공격하지 않는 피난처요 부상당한 이에게는 구원의 희망이어서 이제는 자동차의 앞유리에도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가 보다.
  도마는 못자국을 만져보았다. 십자가를 확인한 것이다. 도마 자신을 위해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신 예수의 그 십자가를 만져본 것이다. 그리고는 십자가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어 고백하였다. 못자국 난 손만이 예수의 손이다. 예수 없는 십자가가 주술적인 부적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는가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를 향하여 도마처럼 말하고 세상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손에서 못자 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은 사람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진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다. 십자가 장식을 멈추어야 한다. 십자가의 신앙화를 경계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자만이 참 신앙의 길에 서있는 것이다.

술.담배가 올무가 되어선 안된다
넌센스 퀴즈 한 토막.
   문:쓰레기통에 뚜껑이 있는 이유는
   답:먼지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득권자들의 횡포와 구조적인 모순을 덩어리로 안고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먼지같은 허물을 정죄하여 마음의 뚜껑, 전도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넌센스를 범하고 있다면 퀴즈의 답에 웃을 일이 아니다.
  개인전도의 경험에서 가장 많은 경우의 장애물은 술과 담배의 문제였다. 술 끊으면, 담배 때문에라고 교회에 나올 수 없는 이유를 말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 도 술이나 담배를 즐기고 있는 이상 교회의 정죄를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신앙처럼 굳게 믿고 있다.
  사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다거나 그것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근거는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너그럽고 원만하며 덕망있는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많이 있는데 단지 술, 담배를 즐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정죄한다면 죄인을 용서받게 하고 의인이 되게 해야 할 오히려 올무가 되는 자기 모순에 빠져버릴 것이다.
  신인현 교수는 이미 20년 전에 쓴 새세대 새윤리에서 한국 교회의 전통과 윤리적 요구가 비성경적인 데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예수님이 사람의 유전과 장로의 유전(마15:2)을 배격하였듯이 교회 전통의 유전을 배격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유독 한국교회만이 여자들의 화장, 머리 모양, 옷 입는 것, 술.담배 등에 대하여 촉각을 세우고 비판하며 정죄하고 있는 전근대적인 고루함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술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광범위하게 언급되어 있고, 특별히 직무를 맡은 자에게는 습관이 되지 않도록 권면한 사실 등을 종합하여 교회의 목회자들은 술 담배 문제가 신앙상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있다. 또한 교회안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술, 담배를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아직까지 이 문제로 교회의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서로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교회의 공공연한 비밀인 것이다.
  신인현 교수는 주변의 고등학교, 일반 대학, 신학교 학생 510명을 대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조사해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응답들이 나왔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예루살렘 회의(행15:1~29)에서는 유대인에게 생명과도 같던 할례를 포기함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교리적으로 바르게 정립시켰으며 유대 종교의 한 분파로서 머물던 울타리를 넘어 세계 종교로 비약하게 되었다.
  우상의 제물, 음행, 피를 음식으로 삼는 일 외에 아무 규례나 규칙, 제도적인 짐을 이방인에게 지우지 않기로 가결 하고 선민 유대인의 긍지였던 할례 마저도 구원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신학적선언으로 인해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였다(행16:5)고 증언하고 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죄의식과 자기 모순에 빠져 괴로와하고 있다. 많은 불신자들이 교회의 도덕적 전통을 신앙윤리로 혼동해서 교회의 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리스도로 인해 율법에서 자유를 얻은 자이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기를(갈5:11)권면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형제를 술담배 문제로 가로막아서는 안된다(롬14:15).
  허물있는 그대로 냄새나는 그대로 받아들여 복음적 회심과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 는 과정에서 절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필요한 경우 직분자에게 요구하는 특별한 덕목으로는 존속될 필요 가 있겠다.
  필자는 신부는 술, 담배가 허용된 제도속에 살면서도 단지 사목적인 이유로만 가끔 술을 마실 뿐이라고 말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우리 개신교의 신자들이 가톨릭 교인들보다 덜 성숙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목회자들이 신부들 보다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먹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롬14:2~3).
  복음을 증거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는 은총을 강조해야 할 교회가 도덕률, 전통윤리, 헌법, 신조, 교리의 선전장이 되어 버린다면 타종교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훈고학적인 인습과 제도적인 틀에 매여 생명력을 잃고 본질과 본질아닌 것을 혼동하고 있는 도덕적 교회에 복음의 생명을 주어야 한다. 성서적 교회, 신앙적, 교회, 성령의 교회, 참 사귐과 기쁨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존경받는 목회자, 칭찬받는 교회
목회자가 사회와 문화, 역사 속에 선 교회의 위치를 바르게 알고 건전한 가치관과 목회철학을 가질 때에 성도의 신 앙이 성서적 기반 위에 성숙하게 되고 사명을 감당하는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런 목회자와 성도가 이루는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며 거룩한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한다. 고여있는 물이 썩어 버리듯 제도화된 교회, 규격화된 성도, 현실주의 목회자가 다름 아닌 나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 하여 안으로는 희생하는 목회자, 넓은 사랑의 가슴을 여는 교회가 되어 밖으로 어두운 사회에 빛이 되는 성도, 존경받는 목회자, 칭찬받는 교회로 변화되기에 힘써야 하겠다.
 
     83. 지도자는 만들어진다
     80. 우리는 종입니다
회사소개 개인정보취급방침 제휴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