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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입니다 프린트   
글로리  Homepage Email [2006-12-18 19:34:19]  HIT : 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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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입니다
해마다 성탄이 찾아오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빌 2:7)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마구간은 종으로 섬긴 그의 짧은 생애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결한 생은 성만찬 석상에서 "나는 섬기는 자로너회 중에 있노라"(눅 22:27)고 하신 말쏨을 남긴 채자기의 몸을 제물로 던진 십자가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탄은 목회자인 우리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는 독특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는 종의 위치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가를 추궁하는 세미한 음성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은근한 가책으로 가슴이 저리어 오는 것을 느낍니다. 목회자는 쉽게 될 수 있어도 예수님이 본을 보인 종은 쉽게 되지가 않습니다. 교회를 맡았다고 해서 누구나 종은 아닙니다. 능력이 있는 지도자일수록 종의 자리에서 교회를 섬기기가 어렵고, 성공한 목사일수록 섬기는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는편으로 많이 치우치는 것이 우리 모두의 현실임을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우리의 잠재의식에는 '종님'과 '종'을 구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목사를보고 '종'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종님'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님으로 인정받는 것은 자랑스러워 하지만 사람의 종으로 취급당하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해 '종! 종!' 하는말을 함부로 사용하면 은근히 불쾌한 표정을 짓습니다. 종님은 좋지만 종은 싫다는 식입니다.
  어느 모임에서 목회자의 위치는 양무리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오히려 아래에서 받들어 섬기는 것이어야한다는 말을 하자 상기된 얼굴로 항의를 하던 어느 동역자가 생각이 납니다. 아마 목회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평신도는 목사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있는데 자꾸 종으로 섬겨야 하느니 목사는 신분상 평신도와 다른 데가 없다느니 하고 떠들면 도대체 나같은 목사는 어디다 발붙이고 일을 하겠습니까?"
  우리 목회자들 사이에는 목사가 섬기는 종이 라는 견해에 대해서 상당한 혼란이 있는 것같습니다. 섬긴다는 정의가 무엇입니까? 목사는 그리스도를 대리한 말씀의 선포자로서 분명 존경을 받아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런 자리에서 종으로 섬기는 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말로는 교회를 섬기는 종이 라고 해도실제로는 섬긴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자꾸 쓰면 자칫 위선자가 되기 쉬우니 종이니 섬기느니 하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양심적으로 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목회자는 양무리를 치는 감독자의 권위를 가지고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권위는 칼빈이 경고한 것처럼, 함부로 사람들에게 취급당해서는 안될 신성한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는 단순히 교회에 고용된 종처럼 취급을 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변덕에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목회자가 섬기는 종의 위치에 서지 아니하면 틀림없이 언젠가는 목회의 생명과 권위가 변질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맡았던 사도들은 자기들의 본업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것에 전무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들의 주된 사역의 성격이 섬기는 일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다시퍼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것을 섬기는 일(diakonia)로 보았기 때문입니다(행 6:4), 바올은 종으로섬기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기의 권위를 다 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9:12). 루터는 목회자의 권위를 일컬어 '높아지는 권위' 라기 보다는 '속박당하는 권위'로 혹은 '불편한 권위'로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권위는 상좌에 앉아서 명령하고 대접받는 지도자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아니하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린 자식을 키우느라 좋은 일과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온갖 뒤치다꺼리를 기꺼이 하는 부모의 봉사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유모에다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이고, 온유한 심정으로 가르치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데서 그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는 그런 성격의 섬김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목사는 섬기는 자리에 서야 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실을 보면 너나 가릴 것 없이 이 섬김의 정신이 많이 퇴색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설교를 하거나 가르칠 때 섬긴다는 정신으로 하는지, 양떼를 위해 기도를 해도 섬긴다는 정신으로 하는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은근히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칭찬을 들으며 대접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번번이 교역자의 대우 문제 때문에 교회가 어려운 시험을 받는일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날수록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흉물이 되기 쉽습니다.
  「목회와 신학」이 몇달 전에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설문내용은 목회자가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응답자가 내놓은 이유가 열세 가지였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두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독재성이 있고 권위적이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을 좀더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목사답게 보이지 않아서'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목사되는 일이 섬기는 종으로 자기가 일할 마구간을 찾는 것임을 안다면 오늘처럼 신학교 지원생이 길목이 터져라 모여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좀 좋아보이는 젊은이를 붙들고 성급하게 신학교에 가라고 권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스펄전의 말이 생각납니다. "할 수 있으면 목사가 되지 마십시오. 피할 수 있거든 피하여 보십시오. 이것은 아무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이 없다면 이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될 수 있는한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어딘가 잘못 비춰진 오늘의 목회자상을 성탄의 마구간에서 다시 바로잡아야 될 것같습니다. 화려한 교회건물, 수천 수만의 교세, 고급승용차, 일급대우,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같은 외형적인 것에서 우리의 바른 모습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깨어진 거울과 같습니다. 아무리 뚫어지게 들여다보아도 일그러진 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상을 받으면 하늘나라에서 받을 것이 없다는 주님의 경고를 가볍게 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목자가 가진 성육신의 의미를 다시 배워서 일그러져 가고 있는 목회자로서의 참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1. 존경받는 목회자
     79. 예수 닮는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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