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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  Homepage Email [2006-12-18 19:34:19]  HIT : 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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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닮는목회자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어떤 목사님 한 분이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에 하나로 신학교의 난립을 지적하는 글을 썼다. 해마다 수천명씩 신학 졸업자가 쏟아져 나오니 앞으로 그들이 어디 가서 일하며 신학생 과잉 문제. 교역자 과잉 문제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염려하는 글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그 목사님의 걱정에 동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실까 생각해보았다. 예수님께서도 과연 한국교회가 목회자 과잉. 신학생 과잉이라고 생각 하실까. 정말 참 목자. 참 신학생이 한국에 얼마나 될까.
  마태복음9장36-38절을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일러라󰡓는 말씀이 나오고 이어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사회에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무리. 제사장과 장로들의 무리가 얼마나 많았던가. 헤롯도 빌라도도 모두 백성의 목자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예수의 눈에 비친 유대사회는 목자가 없는 사회였으며 추수할 일군이 적은 사회였다.
  목자라 해서 모두가 목자가 아니며. 일군이라 해서 모두가 일꾼인 것은 아니란 것이다. 요한복음10장8절에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며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말이 있다. 예수가 없는 목회 예수의 정신을 갖지 않는 목자는 모두 불법을 행하는 목회. 절도와 강도같은 목자들이란 것이다. 예수처럼 하는 목회. 예수처럼 사는 목자가 참 목회요 참 목자란 것이다.
  이는 비단 목회의 측면 뿐만 아니다. 신앙의 측면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18장8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하셨다. 믿음이 다 믿음이 아니며. 신앙이라고 다 신앙 아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앙. 그런 신앙을 재림 때에 보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며 목회적인 측면과 신앙적인 측면에서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두가지 제언을 해보고자 저 한다.

양을 제대로 아는 목자가 필요하다
목자가 선한 목자가 되려면 양들을 알아야 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10:4-5) 여기에 󰡒안다󰡓는 말 '기노스코(ginosko)'는 이론적인 앎이 아닌. 체험해서 아는 것을 뜻한다. 즉 목자는 양들을 교실에서 책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친히 심방하고 돌봄을 통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연구소가 펴낸 [한국교회 성장과 신앙양태에 관한 조사연구]에 의하면 한국교회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대체로 교회 대형화 추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그 보고서는 주요 10개 교단산하 150개 교회의 목회자 및 평신도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다.
  그 결과에 따르면 평신도 응답자의 39%가 300-500명 규모의 교회 크기를 가장 바람직 하다고 했으며. 500-1,000이 21.9%, 200-300명이 19.2%, 1,000명 이상은 9.5%, 2백명 이하는 11.5%였다.
  한편 목회자들의 경우는 42.3%가 300-500명 정도의 크기를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으며 500-1,000명은 21.8% 200-300명 17.9%로 나타나 결국 92.3%가 1,000명 이하의 교회 크기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연구보고서는 결론적으로 조사 대상자의 79%가 200-1,000을 가장 바람직한 교회 크기로 원하고 있으며. 교인들이나 목회자 모두 교회의 대형화를 원하지 않고 있으며. 적절한 교회의 크기로는 300명-500명 규모의 교회를 희망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양들이 참으로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목자 하나가 얼마나 많은 양들을 거느릴 수 있는지 그 역량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 교회에 교인수가 1,000명을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사님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들어보면 1,000명 이상의 교인들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고 그래야 성공한 목회자가 될 수 있고 목회다운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목사님도 1,000명 교인에. 주일엔 7부-8부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 과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 것인가. 목회학적으로 교역자 한 사람이 제대로 돌볼 수 있는 교인의 수는 고작 200명이라고 한다. 양의 형편을 잘 알아서 먹이고 마시우고 잠자리를 봐주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려면 목자 한 사람의 힘은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무한정 많은 양을 거느릴 수 없는 것이 확실한데도 교인만 많으면 된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는 자기가 돌아보고 있는 양들의 공동체에서 무슨 일이 생겨나고 있는가. 거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양들에게 긴급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오늘 이 사람들이 여기에 나왔는가 하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 일주일 동안에 교인 생활의 방향과 요청을 집약해서 설교로 표현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설교자 나름대로의 주관적인 설교를 해버리고 만다면 이는 공동체의 객관적인 요청과 전혀 결합되지 않는 설교가 되어버리고 만다.
  예컨대 하나님을 중거한다고 하자. 설교자의 과제는 공동체에게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닌. 역사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곤경에 처해 있는 그 상황에 대답이 되도록 들려주는 것이 목회자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1,000명 교인, 2,000명 교인도 좋다. 그러나 문제는 목자가 그 교인들을 다 돌볼 수 있느냐. 양들을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경우 교회는 분가(分家)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꾸만 불어나야 한다. 세포가 불어나듯이 모교회 (母敎會)를 중심으로 자교회(子敎會)들이 생겨나야 한다. 한 교회의 모이는 수가 목회자의 역량을 넘어갈 때 그 교회는 분립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양들은 목회자의 양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양들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목회인가
목회자는 그 목회의 동기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 예수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그 후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을 듣고나서야 󰡒내 어린 양을 먹어라󰡓고 하셨다. 이는 양들을 치고자 하는 모든 목자들이 다시 한번 숙고해 보아야 할 사실이다.
  흔히들 오늘의 한국교회를 염려하여 이르기를 “오늘의 한국교회는 기업화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기업적으로 교인의 수를 늘리고 그 숫자를 유지하며. 더 증가시키는 데 힘을 쏟는다. 그래서 버스를 동원하며 수십리 떨어져 사는 교인들을 수송하고. 이교적인 부흥회를 통해서라도 새 교인들을 몰아들인다.
  일단 그렇게 해서 성장된 교회는 점점 비대해져서 기업화되고 그 운영방법도 주식회사나 다름없는 인상을 받게 된다. 확실히 오늘의 한국교회는 경제가 성장해가고 사회가 변화해감에 따라 교회의 모습도 점차 대형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양적 성장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교회는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성장해야 한다. 교회는 힘을 다하여 믿지 않는 영혼들. 믿다가 낙심한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양적인 성장없는 질적인 성장 역시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런 노력의 동기가 주님을 위한 것이냐. 자기를 위한 것이냐에 있다. 그 동기가 주님을 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있느냐. 아니면 자기 이름을 날리고 소위 목회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한 것이냐에 있다.
  크리스챤은 상품이 아니다. 공업이나 상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자본을 많이 들이지 않고서 좋은 물건을 만들고 많이 팔아서 이득을 많이 얻으면 그것이 경영학적으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는 안된다. 교회는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들의 공동체로서. 목회자는 교인들 수의 많고 적음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시는 양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먹이고 기르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새 신자를 육성하며 끌어들이는 일을 해야 한다. 양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개인들이 되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이 잘 되시고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를 얻으시며.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삶 속에서 실현되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숫자를 늘리고 더 증가시키기 보다는 교인 하나하나가 올바른 크리스챤이 되도록 목양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성공적인 목회는 하나님의 양. 그리스도의 양을 얼마나 맡았던지 맡은 양을 바로 길러서 하나님의 양답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영리가 목적이 아니며.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를 위한 목회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목회를 할 때 어찌 한 건물 내에 교회 간판을 두개. 세개씩 걸 수 있겠는가. 어찌 교회를 부동산 소개하듯 소개하고 전매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뗄래야 뗄 수 없는 목회와 신학
흔히들 한국교회는 신학이 결핍되어 있다고 한다. 1983년 어느 잡지사가 서울 시내 8개 교단(예장 합동, 통합. 감리. 성결. 침례. 하나님의 성회. 그리스도의 교회 등) 5백명의 신자를대로 그들이 어떻게 주일을 지내고 있는지를 조사한 일이 있었다. 그 결과 서울의 기독교 신자들은 주일관이 정립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주일의 경제 행위에 대해서도 퍽 자연스럽게 생각할 뿐 아니라 주일 저녁 예배를 오후 3-4시경에 드려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주일 저녁 예배를 주일 오후 2시나 3시에 드린다. 교인들은 주일날인데도 마음대로 물건을 사고 팔며. 직장엘 가고 여행을 떠난다.
  이같은 교인들의 확고한 주일관 부족은 신학이 없는 목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목회자들이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하고 교인들을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마음 못지 않게 형식도 중요하다. 주일 저녁 예배는 주일 낮 예배와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름 그대로 찬양예배가 되어야 하며. 저녁예배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예배의 내용 못지 않게 시간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 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55:17)󰡒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출29:39)󰡒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출27:21)󰡒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24:3)󰡒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모든 국민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왕하16:15)󰡒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매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이 모든 구약 구절들은 기독교의 저녁예배의 먼 배경이 되는 것들로.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날과 달과 해와 절기의 규례가 폐하여졌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기독교의 예배에 반명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서구의 교회 중 저녁 에배를 안드리는 교회는 보았어도. 낮 예배에 이어 저녁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예배의 횟수를 지키는데 관심치 않으시고 우리가 얼마나 힘든 가운데서도 때를 따라 그에게 마음을 드리느냐에 관심하신다. 도시생활에 집에까지 갔다가 저녁에 다시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편하니 낮예배에 계속하여 똑같은 형식의 저녁 에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 인간 위주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위주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때를 따라 내리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 주일 새벽. 낮. 저녁 예배를 때에 맞춰 드리는 것은 성서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의 정성을 바친다는 의미에서도 합당한 행위인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에 신학이 없다는 것은 이 외에도 여러가지 면에서 보여진다. 어떤 교회는 삼일기도회로 모이면서도 기도의 순서는 없고 성경공부만 하고 마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형상 가운데 하나는 예배당 건축에 대한 과잉 경쟁이라 할 것이다. 중세기의 교인들의 무지와 맹종의 토대 위에 세워진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방불케 하는 오늘의 예배당 건축은 그것이 과연 건전한 신학적인 근거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교회마다 앞을 다투어 수십억. 수백억을 들여 화려한 예배당을 건축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은데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고 그 건물을 운영하기 위해 거기에 교회의 헌금이 대부분 투자된다면 이는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 본다.
  구약의 교회는 제사하는 교회라면 신약의 교회는 증거하는 교회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을 잡아 제사하는 일이 예배의 중심부를 이루었기에 성전과 제단은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 아주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셨기에. 그리고 종말론적인 선물이신 성령께서 오셨기에. 그러한 제단과 성전 건물은 필요없게 되었다.
  이 은혜의 시대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눌 건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어떤 한정된 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 지은 성전을 초월하여 영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믿음의 하나님이시라는 반성전 (antiiemple)사상을 강조하는 설교를 했다. 초대교회는 대부분 가정에서 출발하여 시작되었으며 (롬16:5 롬1:2) 칼빈은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곳이면 어디나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건물의 웅장함이나 화려함에 그 생명이 있지 않고. 보다 내적인 것. 즉 성령의 예배와 사랑의 교제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있다. 신약의 교회엔 공동체가 모여 어려움 없이 주님께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하며 떡을 떼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를 증거할 수 있는 건물이면 족하다. 솔로몬의 성전처럼. 헤롯의 성전처럼 그렇게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교회는 화려한 예배당 건축과 그 운명을 위한 경비를 복음의 전파와 교육. 구제 등 주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이다.

목표가 분명한 평신도가 아쉽다
1983년 5월 한국신학연구소가 주최한 [한국인 기독교인의 의식구조]를 주제로 한 심포지움에서 참석자들은 문화적 측면에서. 목회학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의 의식 구조를 분석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 특히 목원대학의 박은규 교수는 한국 기독교인 의식 13가지를 발표했다. 그 중에 몇개를 보면. 첫째. 한국교회 교인들은 공통된 신앙의 동기를 갖고 있는 데 그것은 곧
    ① 위안을 받기 위해
    ② 가난 극복 등 생활의 평정을 얻기 위해
    ③ 이기적 동기로
    ④ 신비적. 기복적인 동기로서 등이다.
  이런 동기의 근거에는 유.불.선.무교의 혼합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으며. 무교적 영향으로 반(反) 이성적. 운명론적. 즉흥적. 주술적 요소가 가미됐고. 불교의 영향으로 명상적. 수동적 요소들이 첨가 되었으며. 유교의 영향으로 가족제도. 계급생활. 수직적 의식구조가 깊게 깔려 있다. 둘째. 생활 태도에 있어서는 의존적이며. 피동적이며. 배타주의적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의존적이기 때문에 종교적 열정이 강하고 초월자에 귀의하려는 심성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나 교회 생활에 있어서는 너무 목회자의 주도적 지도력을 좋아한다. 또 한국교회 교인들은 피동적이어서. 의무를 지워주면 잘하나 창의적으로는 하지 않는다. 또한 배타주의적이기 때문에 개교회주의를 낳게 되었다.
  셋째. 예배와 관련된 의식구조에 있어서 설교를 통해 위안을 받고 즉흥적으로 유흥하려는 무교적 요소가 짙고 이는 예배의식 구조에 있어 커다란 장애요소가 된다. 예배에 있어 한국교회 교인들은 불교의 영향으로 백일기도회 등 공양의 방법이 사용되며. 유교의 영향으로 장례식. 추도식 등을 중요시하고 남존여비. 장유유서 등 청년과 여성의 폭을 줄이고 있으며. 무교의 영향으로 단지 예배를 드렸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네째. 기도의 내용이 왜곡되어 있다. 기도란 것이 깊은 명상 속에서 세상을 향할 때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있는데도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복적. 주술적. 이기적. 자기 감정 발산적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발표는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의 의식 구조에 갱신이 있어야 할 것을 보여준다. 사실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기 전 한국 사회는 수천년 동한 무교와 불교. 유교의 지배를 받아왔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인의 심성에는 무교적인. 불교적. 유교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기복적 신앙. 역사 및 윤리 의식의 결핍등이 한국교회의 문제로 대두되어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불교와 유교 등 타종교를 믿는 심정으로 기독교를 믿고 있다.󰡓 󰡒복을 받는 일. 복을 비는 일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일보다 우선시 되어 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된다는 '값싼 복음' 때문에 복 받기 위해 밀려든 '무리'와 '떼들'만 보고 부흥되고 있다고 자부하는 한국교회가 되어가고 있다.󰡓󰡒교인들 사이에서는 '축복 받았다'는 뜻이 돈 벌고 병 낫고 출세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 성공개념이 극히 세속적인 뜻에서 쉽사리 해석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대로 가다간 .와우 아파트.처럼 언젠가는 크게 쓰러질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이런 것들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의식구조가 샤마니즘의 영향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소리들이다. 이런 이교적인 사이비 성공개념은 큰 교회당 건축. 고급 승용차의 사용. 고액의 사례금 수령 등으로 점차 해석되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민족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 종교가 민족 앞에 어떤 영향도 미미치 못하는 종교가 되고 있다. 신도수는 1천만을 자랑하지만 기독교는 이 민족을 변화시키고 움직여가는 일을 못하고 있다. 언젠가 갤럽조사에서 남한을 움직이는 사람들 명단에 대통령. 국회의원. 정치인. 경제인은 들어갔어도 목사는 한 사람도 들어가질 못했음은 이를 증명해준다.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의 의식구조는 성령 안에서 속히 한국교회 교인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이교적인 요소는 다 걸러내고. 기독교적인. 성서적인 요소만이 남게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이지 율법 (nomos)의 종교가 아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율법의 종교이다. 자기 힘으로 기도하고 전도하고 노력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이다. 선을 행하고. 불공을 드리고 참선을 해서 해탈을 하고 도를 닦음으로서 구원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한다. 나는 죄인이고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인데 은총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나의 행위가 있기 전 그분의 행위가 먼저 있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감사와 찬송과 감격의 종교이며. 죄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종교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를 회개 하고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 만물과도 정상적인 관계를 갖는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이기적인 대신에 이타적이며. 세속적인 대신에 영적인 종교다. 그러므로. 복 받기 위해 헌금하고. 복받기 위해 선을 행하며. 복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배격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가졌을 때 오는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내게 그런 세상적인 복을 주시지 않더라도 영적인 복 십자가의 구속의 복을 인해 크리스챤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것이다.

자기성찰이 갱신의 토대
한국교회 갱신은 목회자의 자기 성찰과 평신도의 의식구조의 갱신을 요구한다. 목회자는 부단히 내가 하고 있는 목회가 과연 양들을 알고 하는 목회인지. 예수를 위한 목회인지. 신학이 있는 목회인지를 반성해야 하고. 평신도들도 한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이교적 의식구조에서 벗어나 성서적 복음적 기독교적 의식구조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평신도들을 올바르게 신학적으로 가르치고 육성하며 지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80. 우리는 종입니다
     78. 어거스틴의 리더십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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