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목회자 올바라야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물량적 측면에서, 즉 교인의 수, 교회의 재정, 건물의 호화성 등의 측면에서 대단히 급성장해왔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의 속도가 세계기독교 역사상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그것보다 놀라우리만큼 빠르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급성장의 효과와 그 영향력을 마지막 때 '땅끝까지의 선교' 에 효과적으로 활용만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나타낼 것으로 기대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물량적 성장을 과시하고 있는 반면 그 질적인 성장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저조하여 지극히 불균형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교회의 질적 성장이란 영적 능력 및 영성개발 신학의 발전 교회교육의 내실화, 세계선교의 확대, 교회의 대(對)사회봉사 및 사회적 책임의 완수,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신도들의 영적 성장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러한 교회의 질적 성장보다는 오히려 교회 재정의 확충, 물질위주의 목회, 교회건물의 호화스러운 치장 및 과소비적 풍조 등에 편승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병적으로 비대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를 면키 어려운 상태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교회 안에서 물질위주의 호화성과 과소비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원인과 동기가 가치관의 전도(顚倒)에 있다고 보고 그 개선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Ⅰ. 세상의 가치관과 교회의 가치관
1. 가치의 개념
가치란 지극히 철학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이다. 가치란 어떠한 사물의 사실을 인식하고 그 사실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사물의 사실에 대한 태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느끼는 사실의 중요성으로서의 그것에 대한 느낌, 욕망, 관심, 목적, 욕구, 그리고 행동 등의 반응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물의 중요성에 대한 반응은 일반적으로 심리적이며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이기를 요청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영백과사전에 따르면 가치에 관하여 경제적 즉 물질적 가치에 관하여만 기록하고 있다.
물질적 가치란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76)에 의해 두가지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첫째, 재화나 용역(用役)을 사용(소비)함으로써 얻어지는 사용가치 즉 효용가치인데, 밀(J. S. Mill)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주관적 가치라고 한다.
둘째, 객관적 가치이다. 이는 다른 재화나 용역을 교환으로 지불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교환가치를 의미한다. 이 교환가치가 시장에서 표현될 때 이것을 가격이라고 한다. 전자는 목적론적 의미에서의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목적과 수단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재화와 용역이 사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희소하기 때문에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지불해야만 한다는 희소성의 가치를 의미한다.
가치에는 이러한 물질적 가치 이외에도 윤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윤리적 가치, 미적 욕구를 충조시키는 미적 가치, 쾌락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쾌락적 가치, 생물학적 가치,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고 인식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인식론적 가치, 그리고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종교적 가치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의 초점이 되는 종교적 가치란 릿츨(A. Ritschl)이 말한 종교적 의식의 대상을 의미한다. 이 견해는 종교적 신앙을 영적 욕구의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종교심리학자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고 있다.
2. 기독교적 가치관
기독교적 가치는 앞에서 언급한 종교적 가치와 일맥상통한다. 종교적 가치가 영적 욕구를 충족하는 신앙 그것에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의 가치관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가치는 종교적 가치보다 그 신앙의 대상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종교적 가치가 단순히 신자의 영적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신앙적 가치라고 한다면 기독교에서의 가치는 이사야의 예언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 시43:21). 전자가 신자 중심의 가치관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가치는 신자의 영적 욕구를 흡족시키는데 있지만 기독교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를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8)라고 고백함으로써 그의 지고(至高)한 가치는 자신의 육신적 가치(앞에서 말한 세상의 6가지 가치들)을 잃고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영적 가치인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의 영적 가치는 신자의 영적 욕구충족을 위한 가치로서의 종교적 가치까지도 초월해서 완전히 신본적(神本的)인 가치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내 안에서는 사망이 역사하고 너희 안에서는 생명이 역사하기를 소원했고(고후4:11) 자신이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딤후4:6)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가 그의 권을 다 쓰지 아니함으로서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원코자 하는 철저한 자기 포기의 삶에(고전9:18~19) 가장 고귀한 가치를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영적 가치는 신자의 영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신앙적 가치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기 포기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인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성취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가치이기 때문에 인본적인 종교적 가치를 초월한 신본적 영적 가치인 것이다.
Ⅱ. 한국 교회의 가치관 무엇이 문제인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교회나 교회지도자 그리고 교인들 가운데 만연되고 있는 물량 위주의 교회성장론(거대한 건물, 교인수, 현금의 양, 호화스러운 기도원 및 교육관 시설), 교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황금만능주의 및 축복과 그리고 과소비 풍조 등은 한국교회의 영성을 저하시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와 신도들은 물질축복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가난은 마치 능력없는 자의 삶이요 버림받은 자의 모습인 것처럼 잘못 가르치거나 잘못 믿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 부유층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장로, 권사 행세를 하려면 적어도 우수한 기업체 사장이나 임원 정도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승진이 빠르고 출세가 빠른 사람, 일류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축복받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축복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출세와 대학합격을 위한 철야기도회는 열면서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기는 기피하고 있는 현실은 복음과 거리가 먼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기에 큰 교회, 많은 헌금, 큰 건물, 호화스러운 시설의 교육관, 고급 승용차를 타는 목회자 등이 교회성장의 상징으로 되어 있고 그런 목회자가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실은 주님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많이 벌어서 많이 바치고 많이 축복받는 것은 진정으로 복된 일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더러운 떡을 주의 단에 드리는 것을 금하셨고(말1:7),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면서 번 돈(말3:5), 그리고 토색한 것등을 받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말1:13)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러한 부자들의 풍부한 헌금이 과연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깨끗한 예물인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겠다.
이러한 부자들의 헌금으로 사치스러운 교회의 건물과 풍부한 재정 그리고 풍족한 소비활동 등에 충당하며 풍요 속에서 예배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 받으시겠는가 생각해봐야 하겠다.
물량 위주의 교회 성장, 호화스러운 시설과 설비, 팽창일로에 있는 교회재정, 늘어만 가는 교인수가 교회성장의 지표라고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교회 안에 침투한 배금사상, 물질주의, 한탕주의, 투기성교회 운영의 방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될 때 교회 내의 황금만능주의와 세상의 그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Ⅲ. 교회 안의 황금만능주의와 그 원인
교회 안의 황금만능주의는 바로 앞에서 언급하 목적론적 가치관 즉 목적과 수단이 혼동되어 가치관이 전도(顚倒)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의 목적(ends)과 수단(means)이 인간 타락으로 인하여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을 통하여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설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전도되었는가를 설명해보기로 하자.
그림의 오른쪽 끝으로부터 왼쪽끝에 이르기 까지 인간활동은 자연채취 생산의 극대화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행복의 극대화에 이르고 그다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 윗줄에 있는 각종 학문은 인간활동의 극대화를 위한 학문으로서의 수단이다. 그리고 아랫 줄의 공장, 설비, 가정, 대학, 국가, 사회, 은행, 정부, 기업 등도 인간활동의 극대화를 위한 수단인 것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최종 목적은 인간 행복의 극대화이다. 이것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소비의 극대화를 가져야 되고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소득의 극대화를 이루어야 된다. 이와같은 논리에 따르면 인간행복의 극대화의 최초 단계(최초의 수단)는 자연채취의 극대화이다. 자연채취의 극대화는 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수단이요, 생산의 극대화는 소득극대화를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른쪽의 단계별 인간활동은 왼쪽의 인간 행복의 극대화를 위한 단계별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의 최종목적은 소득이다. 기업이나, 사업, 경영학 등과 같은 것을 수단으로 한 인간행복의 극대화에 있다. 즉 경제학이 추구하는 인간활동의 최종목적은 소득이나, 기업이나, 사업, 경영학 등과 같은 것을 수단으로 한 인간 행복의 극대화에 있다. 즉 경제학이 추구하는 인간의 최종목적은 소득이나 재물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경제학도나 현대인들은 물질이나 기업, 사업, 대학, 학위 등을 인간의 최종목적으로 삼고 인간의 최종목적인 인간의 행복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목적과 수단의 전도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목적인 인간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수단인 학교, 기업, 소득, 사업, 학문 등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인간은 소외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인간을 짓밟고 사업을 일으키고 인간을 희생시키며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려는 무서운 죄악을 저지른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목적과 수단은 무엇인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목표이어서 인간의 행복까지도 수단으로 쓰여질 때 참다운 영적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인과 목회자 중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하여 물질과 건물의 성장을 추구하며 목적인 인간사랑과 인간행복을 포기하고 건물과 헌금 심지어는 교인수의 확보에 급급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행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수단으로 삼아 수단인 물질, 건물(이것들은 다스리고 잘 관리해서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수단/ 창1:28)을 목적으로 삼는 가치관의 전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목적인 인간의 행복을 수단으로 하여 수단인 소득, 기업, 사업, 대학, 가정, 결혼, 학문, 정부, 정권 등을 목적으로 삼아 획득하려는 가치관의 전도를 보이는 반면 현대의 크리스챤들과 마지막 시대의 목회자들 가운데는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수단으로 삼가 수단인 물질과 건물, 그리고 교인수의 증가 등을 목적으로 얻으려는 가치관의 전도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목적이 되고, 수단이 수단이 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창1:28)에 부합되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창조자로부터 소외된다.
Ⅳ. 가치관의 전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교회 안에서의 황금만능주의와 과소비 물량적 성장위주의 교회성장은 목회자와 현대 교인들이 가치관을 전도시켰기 때문이라고 지금까지 말하였다. 즉 목적과 수단을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가치관의 전도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이것은 영적 치료로서만 가능하다. 그 길은 무엇인가?
첫째, 회개해야 한다.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정욕(롬1:25)을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금이나 은을 마음에 두기를 좋아하여 그 마음이 허망하여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롬1:38) 따라서 각종 추한 행동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롬1:18) 그러므로 한국의 목회자들과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 그리고 현대교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조물주를 피조물보다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회개해야 한다. 변화를 받아야 한다.
둘째, 회개의 바탕 위에 창조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축복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인격자인 인간을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영적인 교제를 하도록 만드셨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니라(마 22:37~40)는 것이다. 그외 산, 들, 나무, 동식물 등은 관리의 대상이요, 하나님과 사랑을 위한 수단이다. 더구나 인간이 만든 금, 은, 동, 의복, 솔로몬의 영광으로 입은 옷 등은 창조의 질서 속에 있는 들에 핀 백합화보다 못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스림과 관리의 대상, 즉 창조의 질서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런 것들을 사랑하고 자연과 동식물을 관리하기보다는 파괴하며, 사랑하라고 사신 이웃은 증오하고 하나님을 멀리해 왔다. 이것이 바로 인간 타락에 의한 창조질서의 파괴요, 목적과 수단의 전도이며 가치관의 전도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창조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관리하고 인간의 수공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사랑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셋째, 사랑의 질서를 회복시켜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관리하고 인간의 생산물을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수공물인 재물이나 물질을 사랑하고 자연 관리의 경지를 넘어 사랑하는 반면, 하나님과 이웃을 증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도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증오하지는 않아도 인간의 수공물인 재물과 물질을 하나님과 인간보다 더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수공물을 이러한 사랑의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사랑의 질서를 회복시켜야 하겠다.
흙바닥 가마니 위에서 부흥은 시작됐다
한국교회는 그 배움에서와 가르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따르는 것같다. 그러나 그 생활 속에서는 세상 사람의 모습과 같이 가치관의 전도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목회자들은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물질축복의 원리(눅6:38, 빌4:19)를 가르쳐 주고 있으나 종종 그 축복이 영적 축복과 상치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다.(시106:15, 전6:2) 목회자들은 더러운 돈이라도 가리지 않고 교회의 전대를 채우고 호화스러운 건물을 건축하고 많는 교인 숫자에 풍요롭고 넉넉한 과소비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를 물질로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세를 당하여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약5:4~6)과 부한 자들의 교만을 책망하신 것(계3:17~18)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세상의 은과 금이 다 여호와의 것이요(학2:8) 모든 사업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신자들의 쓸 것을 채우실 것(빌4:19)을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물질도 집도 아내도 가정도 그리고 젊음의 삶도 다 허락지 아니하셨을 때 바울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겸손히 순종하며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목회자, 가난한 교인이 아버지의 뜻일진대 누가 탓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영성을 날카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시106:15, 전6:2). 다만 우리는 모든 산업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의뢰할 뿐이다(시106:14~15).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모세는 그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감을 허락받지 못했다. 모세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가 대단히 컸기 때문에 모세를 다는 저울추는 대단히 무거웠던 것이다. 모세의 위대한 업적과 하나님 사랑하는 그 사랑이 지극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는 모세의 조그만 실수에 진노하시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오늘날 우리의 거울로 삼으셨다.
목회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여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한 바울의 고백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고전9:27) 물질 물량 그것은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한번 포기하는 성숙한 크리스챤이 되어야 하겠다(눅1:38, 전6:2).
끝으로 필자가 1987년 미국 훼이스 신학교 학위수여식에 참석했다가 국제 기독교협의회(ICCC) 총재이며 그 신학교 총장인 맥킨타이어(Mckintire) 박사가 그의 치사에서 한국교회를 언급했던 말 한 마디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맺으려 한다.
“한국교회의 영적부흥은 흙마루 바닥에 가마니 깔고 예배하며 기도할 때 일어났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의자에 앉아 난방과 냉방장치 아래서 너무 편하게 예배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교회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자 그 영성이 사라져가고 말았다
깊이 생각해 볼만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