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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僭濫(참람)인가? 프린트   
글로리  Homepage Email [2006-12-18 19:37:31]  HIT : 5431  
마태복음 9:1-8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본문은 예수께서 침상에 누인 채 당신 앞에 나아온
한 중풍병자에게「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데 대한 서기관들의 반응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이러한 반응을「악한 생각」이라
규정하시고 당신께 이러한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렇다면 왜 서기관들은
예수의 이말「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 대하여 발끈하여
「참람」이라고 말했던가?

서기관들이 생각하는「참람」은 무엇이었으며
어찌하여 그것이 예수께는「참람」이 아니었던가?
여기서「참람하도다」는 말은「βλασφημεω,블라스페메오」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주로「훼방하다, 비방하다, 모독하다」등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결국「참람」이라는 의미는 사람이
성경(하나님)을 훼방하고 비방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즉 예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죄 사함」의
문제를 자기 소관인양(?) 말했으므로 당연히 성경을 비방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소위 성경에 대해서라면
「박사님」들이신 서기관들께서 이점을 놓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합니다.「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동일한 내용을 마가와 누가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7,눅5:21)」
는 서기관들의 반응을 덧붙여 쓰고 있는데 그럼 이 말이 잘못된 말인가?
사실 시편 32:1-5의 말씀이나 이사야 43:25, 44:22등의 말씀을 참고해
볼 때 서기관들의 주장은 당연히 옳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인간들의
죄를 사해주시는 분으로서「주 여호와」를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히 무엄하게도(?) 인간 예수가「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서기관들의 해박한 성경지식이 이점을 놓치지 않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기 때문에 무조건 옳아야 하는가?
서기관들 편에 서 주실 분은 아니 계신가?
문제는 서기관들이 가진 성경지식이 틀렸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성경지식이 말에 그치고 능력화 하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4: 20).


그러면 무엇이 말이고 무엇이 능력인가?
「말」은 신학교나 교회에서「배운」것이고
「능력」은 하나님의「선물」입니다.
서기관들은 이 능력은 없이 말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이것입니다.
즉「하나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말은
맞았지만 그 「하나님」이 자기들 앞에 서 있는「예수」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의 맹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안다」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그것은 반드시 훼방으로 되나온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될 뿐만 아니라(마 23:15)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마 26:24)
그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동방박사들이 예수께 경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가 하고
물었을 때 백성의 서기관들과 대제사장이 이구동성으로 외친 말이
미가 5:2입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 2:6)」

그러면 이렇게 성경을 잘 아신 이 분들이 무엇 하셨는가?
베들레헴에 달려가 메시야로 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셨는가?
아니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메시야를 죽이려는 음모에 동참했는가?
차라리 미가5:2이 없었더라면 아니 몰랐더라면 메시야를 죽이려는
엄청난 음모에 말려들지는 않았으리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심판을 받을 대상들이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어야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은혜요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한다면
성령으로 오시면 알아보겠는가?
어떤 모습으로 오더라도 알아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히「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 10:14)」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천년이라는 시간과 유대 땅이라는 공간에 한정된
채 인간들을 상대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경을 통하여 말씀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데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알아보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괜히 필요 없는
논쟁에 말려드신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즉 중풍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운운하지 마시고 그냥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여
중풍병만 고쳐주셨더라면 모든 사람들의 경이의 눈초리를 받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왜 일부러「서기관들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를
불러내시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경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의 병 고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이해되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아니면 병을
고쳐 주신 것인가?
예수님이 육신적병자의 의사로 이 땅에 오셨는가?
「그렇다」고 대답하신다면 이것이 바로 서기관들의
「이 사람은 참람하도다」라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예수는 중풍병자의 병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예수의 관심과 사람들의 관심의 차이가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참람」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참람인가?
「병이나 고치지 왜 죄의 문제를 언급하느냐」입니다.
병 고침은 죄 사함의 모형으로서 그림자로서 설명의 도구로서 등장한 것
인데 이 병 고침이 죄 사함을 가진다거나 그 우선순위에서 앞서게 되면
병 고침 자체가 죄요 훼방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메시야를 백년도 못되는 인간육신의 메시야로 한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비극입니다.
예수는 예수일 뿐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말이 서기관들의「참람」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서기관들이 간과한 그 그리스도는 어디 계시는가?
이 질문에 갸우뚱하실 분들이 꽤 많으리라.
「그리스도」가 어디계시냐 라니? 예수가 그리스도이지
그리스도가 별도로 계신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의「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태도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태도나 오십보백보입니다.
예수가 과연 그리스도인가(요일5:1)하는 질문이 심각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심각함 없이 다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배워서」알고 있을 뿐입니다.
한술 더 떠서 예수는 성이고 그리스도는 이름정도로 알고 있기까지 합니다.
「요일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님께로서 난 자니...」

본문의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6절의「권세,εξουσια,엑수시아」로 존재하십니다.
이 귄세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신 분이지 인간이 사해준 것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은 인간 예수만 보고 그가 가지고 있는(εχω) 권세를 간과했는데
이 실수가「훼방 βλασφημεω,블라스페메오」을 야기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권세를 예수의 권한이나 권능으로 생각할 때 오해를 일으킵니다.
예수의 권한이 아니라 권세의 예수이십니다.
이「권세」가 오늘 본문에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주체」이며
마지막 날에 인간을 심판하실 주체(요 5:27),
곧 말씀(=ὁ λογος, 호 로고스)이십니다.
요 12:48절 뿐만 아니라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의 머리(αρχη, 아르케)(골 2:10)로서의
인격적 실체이시며 바울 사도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고
권하는 그 권세들의 머리로 존재하시는 권세이십니다.
이 권세가 예수 속에서 역사하신 결과가
곧 그의 십자가 죽음이었으며(사53:6,10)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의 부활이십니다.(행 2:36,롬 1:4)
결국「재림」하실 분도 이 분이신데(계 12:10) 우리들은 과연
「초림」예수를 향하여 훼방하던 서기관들의 전철을 밟지않을 능력이있는가?
메시야가 오리라는 사실을 안 믿어서 서기관들이 예수를 훼방한 것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예수를 훼방하는 이 비극을 보시는가?

오늘날 예수 재림을 안 믿는 기독교인이 있는가?
그것도 영광 가운데 나팔을 울리면서 구름 타고 오시리라고,
그래서 우리를 공중으로 끌어올려(휴거) 우리 눈에 눈물을 씻기시고
황금보석 꾸민 집에 천년만년 영원토록 살게 하실 것이라고 안 믿는 신자가
계시냐 말입니다. 문제는 너무 잘 믿어서(?) 탈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믿음이 예수 재림하시면 훼방을 늘어놓을
바로 그 성경에서 나온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예수」를 믿는 믿음이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상 당신의 다시 오심에 대하여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여기 있다 저기 있다」식의 장소적 재림이 아니라는 것(마 24:23)과,
번개의 번쩍임같이(마 24:27), 또한 도적같이(마 24:43)임하므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리라(마 24: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겠다(마 24:30)는 무슨 말인가?
보는 사람들의 영광이요 누리는 사람들의 능력이란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의 중보기도(요 17장)에서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하신 기도가 이루어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의
우리가 누리고 보는 능력과 영광이란 말입니다.
이를 우리에게나 은혜요 선물이며 감격스런 재림이지
「평안하다 안전하다」하며 기뻐하는 저희(살전 5:3)에게는 감쪽같이
지나가 버리는 재림이요 설령 그 재림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그 입에서
나올 것이라곤 오늘 본문의 서기관들처럼「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는
말이나 외치고 돌아설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토록 유대인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야의 출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과거는, 메시야의 재림을 목이 메어 기다리는 오늘날
이 땅의 신자들에 의해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낼 것인가?
꼭 미래에 가 봐야 알 수 있는가? 아닙니다.
역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마지막 8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8절)」

여기서 번역상 한 가지 고칠 점은「사람」이 단수가 아닌 복수라는
점(ανθιρωποις, 안드로포이스)입니다. 고로 본 절은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으로 고쳐야 합니다.
「사람」이면 어떻고「사람들」이면 어떤가! 아닙니다.
사람이 단수이면 본문의「예수」에 한정하는 것이지만
사람이「사람들」이면「예수」로 말미암은 그「형제들」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예수」가 소유한「권세」를 사람들 속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실상은 사람들 속에 있는 권세의 역사로 하여금)
죄를 사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2-23)」 하시는데
그러면 제자(인간)들이 죄를 사한다는 말씀이신가?
아닙니다. 그 제자들의 성령께서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마태복음「권세」가 요한복음에서는「성령」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능력은「권세」로부터 나옵니다.
이 권세로 말미암은 것이 신앙이고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 훼방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의"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 참람이 아니라,
그 말이 참람이라고 규탄하는 그들의 말이 참람인 것입니다.

「병고침」으로「죄사함」을 가리우는 모든 말과 행위가 모두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것임을 압시다.
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기는 하나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들입니다(히 1:11-12).
옷이 낡았다고 해서 몸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가?
지금 보이는 우리의 몸은 장차 우리가 누릴「몸의 구속」(롬 8:23)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모형으로 원형을 가리우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우리도 소경인가?(요 9:39-41)」하지 말고
진심으로「눈뜨기를 원하나이다(마 20:33)」합시다.

 
     39. 꿈 꿈을 꿉시다
     37. 고장난 사람-백선기목사님 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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